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말플라케 전투 (문단 편집) == 배경 == 1709년 봄, [[루이 14세]]는 프랑스군이 최근 몇년간 영국-오스트리아 연합군에게 [[블레넘 전투]], [[라미예 전투]], [[오우데나르데 전투]], [[릴 공방전]]에서 연이어 참패하고 설상가상으로 1708~09년 겨울의 대한파로 인해 프랑스 전역에 대기근까지 돌면서 60만 명 넘게 사망하는 등 더 이상의 전쟁 수행이 불가능함을 깨달았다. 이에 루이는 전쟁을 끝내기 위해 말버러 공작에게 밀사를 보내 휴전을 제의했다. 말버러 공작 역시 전쟁을 하루속히 끝내야 한다고 판단했다. 당시 [[앤 여왕]]은 존 처칠의 부인이자 자신의 절친한 친구였던 사라 재닝스 처칠의 지나친 정치 간섭에 질려 그녀에게 "우리의 우정은 끝났다."라는 내용의 편지를 보냈다. 이에 정적들은 여왕이 존 처칠에게 등을 돌렸다고 판단해 정치적 공세를 가했고, 국민들 역시 오래 지속된 전쟁에 지쳐 그들 사이에서 존 처칠이 전쟁을 일부러 질질 끌고 있다는 비난이 쏟아졌다. 이러한 분위기를 읽은 존 처칠은 당시 영국 내각을 장악하고 있는 휘그당에게 프랑스와 강화해야 한다는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나 연이은 승리로 기고만장해진 휘그당은 루이 14세에게 평화 협상을 해주는 대가로 40개의 조건 수용을 요구했는데 그동안 점령한 영토를 전부 토해내라는 등 프랑스 입장에서는 하나같이 가혹하다고 할 수 있는 조건이었으나 그 중에 손자 [[펠리페 5세]]를 물러나게 하거나 어떠한 도움도 주지 말라는 요구를 본 루이 14세는 "내가 전쟁을 해야 한다면 나는 적들과 할 것이다. 상대는 나의 손자가 아니다"라는 말을 남긴 뒤 수용을 거부했다. 그리고는 백성들에게 대자보를 발표했다. >"나는 개인적인 희생을 치르고 명예가 훼손당하는 일이 있더라도 내 백성들에게 필요한 평화를 곧바로 얻기 위해서는 내 성품에 맞지 않는 일이라도 기꺼이 해 왔다고 말할 수 있다. 나는 우리 스스로 지킬 준비를 하는 것 말고는 다른 어떤 대안도 더이상 찾을 수 없다. 나는 우리 프랑스를 누르기 위해 무력과 책략으로 모인 모든 힘보다도 통일된 프랑스가 더 강력하다는 것을 확인하기 위해 여러분의 도움을 청해야 할 지경에 이르렀다. 이 대결에는 여러분의 안전이 포함되어 있다. 우리가 힘을 모은다면 적은 우리가 결코 부당하게 대우받지 않는다는 것을 이해할 것이다." 국왕이 직접 대자보를 발표하며 지원을 호소하자, 프랑스 각지에서 백성들이 호응해 짧은 시간 안에 수많은 지원병이 파리로 몰려들었고 막대한 기부금 역시 모였다. 루이 14세는 이를 통해 대군을 편성하고 당시 프랑스의 유일한 희망으로 간주되고 있던 [[클로드 루이 엑토르 드 빌라르]] 원수를 사령관으로 삼으면서 무슨 일이 있어도 파리를 향해 진군하는 적을 격퇴해달라고 부탁했다. 이에 빌라르 원수는 적절한 때가 올 때까지 전투를 회피하기로 하고 1709년 6월 연합군이 릴에서 출발해 투르네 요새를 공략하는 걸 방관했다. 그러면서 영국 해협의 연안부터 아르덴 지역까지 이르는 국경 지역을 요새화해 연합군이 더이상 진격하지 못하게 했다. 1709년 8월, 연합군은 2달에 걸친 공방전 끝에 투르네 요새를 공략했다. 이후 연합군은 몽스를 향해 진군을 개시했다. 몽스가 공략당하면 파리로 향하는 진로가 생기기 때문에, 빌라르 원수는 이곳만큼은 사수하기로 결정했다. 그는 말프라케 마을과 라 폴레 마을 사이의 협곡에 자리를 잡고 적이 오기를 기다렸다. 8월 29일, 말프라케 협곡 인근에 도착한 연합군 총사령관 존 처칠은 당장 공격하려 했다. 그러나 연합군 고위 장성들과 네덜란드 관료들은 이를 반대했다. 그들은 거듭된 행군으로 많은 병사들이 도망치고 있으니 여기서 쉬면서 병력을 규합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존 처칠은 어쩔 수 없이 그 말에 따랐고, 그 사이 부플레르 공작 루이 프랑수아가 이끄는 프랑스군이 빌라르 원수의 군대와 합세했다. 부플레르 공작은 빌라르보다 계급이 높았지만 기꺼이 그의 지휘를 받겠다고 나섰고, 그 덕분에 프랑스군은 지휘부가 서로 분열되었던 오우데나르데 전투와 달리 이번에는 일치단결한 자세로 전투에 임할 수 있었다. 그렇게 며칠 간의 시간이 흐른 후, 연합군은 9월 11일에 비로소 공세를 개시한다. 이로서 파리로 진군하려는 연합군과 이를 저지하려는 프랑스군 간의 대결의 막이 올랐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